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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여는 글귀

[스크랩] 황혼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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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 예찬

         炚土 김인선

 

황혼이라는 번호판을 달면 질주의 본능으로 답답해진 엔진에 부화가 걸리고

찢어질 듯한 제 소음을 들으며 매캐한 매연만 폴폴 뿜는 낡은 자동차로 변한다

 

초조하다

앞길이 보이지 않는 굴곡진 낭떠러지의 좁은 길에서 반사경에 비친 추락 주의 표지판도 무시하고

거칠게 회전하는 고집이 생긴다

차도를 이탈할 듯 휘는 바퀴가 허공 향해 위험스런 소리를 내야

짜증 난 조급한 갈등이 못 이긴 채 속도 제한을 하느라 격한 브레이크 밟는다

 

겁 없이 상승했던 RPM이 자책하며 뚝뚝 떨어져 동체가 차분해져도 뛰쳐나가고 싶은 욕망으로

가는 바늘이 가리키는 속도계의 끝자리를 멀거니 본다

마음에 깊이 새겼던 완벽의 표시

꿈꾸었던 저 소망의 속도를 정녕 이제 낼 수 없는가

 

황혼의 차창 밖에서는

나무와 새 꽃과 낙엽 그리고 아이가 타고 가는 반짝거리는 자전거 바퀴살

온갖 꾸밈없는 것들이 고운 눈망울로 미소 띠고 있다

왜 저것들을 외면하고 달려왔는지 고개를 숙여 엉뚱한 길로 미친 듯 뛰던 발을 본다

원망스런 눈빛을 받는 발이 엄지를 꼬부리지만

바쁜 것은 발이 아니라 마음이었으니 발을 탓할 수 없지 않나

 

황혼이 되면 하늘에 흩어진 구름이 머무는듯해도 움직이고 있다는 것에 

아쉬워 몰래 보게 되고 

뒹구는 낙엽 위로 빈 나뭇가지에 스치는 바람 소리를 휑한 가슴으로 듣게 된다

멀어지는 황홀한 생의 반사각을 쫓아

지나간 삶의 격한 냄새를 애타게 맡으며 남은 세월을 저울에 올려놓고 

눈물로 흥정하는 버거운 욕심에 애달픈 외침을 하게 된다

 

인생이란 살다 보면 갑자기 동력이 끊겨 내리막을 곤두박질한 롤러코스터처럼

한순간 관성을 잃고 멈출 수 있고 새 포맷을 깔지 못하여 느려만 가는 삶의 카테고리마다

꺼져가는 불빛에 문득 혼자인 것 같아 서러울 때가 있다

 

특히나 미래란 마음대로 접속하여 볼 수 있는 시간이 아니기에

자칫 행복이라는 프로그램이 무참히 해킹당하고 자기의 계산된 명령이 지워져 복구할 수 없는

오류의 창이 뜨고 있다고 허망하게 주저앉을 수 있는 시기가 바로 황혼이다

그러나 희망을 지니고 시스템 복원을 해야 한다

 

그 옛날 척박한 아일랜드 어부의 혼처럼 얼어 있는 바위산을 한쪽씩 캐내 부셔가며 

한 줌의 흙을 긁어 모아 화단을 만들고 희망의 씨를 뿌렸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파도치는 바다를 노래하고

차디찬 하늘 노래하며  삭막한 돌의 정원에 피의 꽃을 피워내야 한다

결핍 속에서 자신의 언어를 전설처럼 이어간 예이츠의 노래처럼

삶과 죽음을 차가운 시선으로 보아야 한다

 

황혼은 험준한 산을 정복하는 당당한 시간이다

운무의 가림으로 알 수 없던 생의 산맥 앞에서 설렘으로 깊은 골짜기를 가로지르고

가파른 암벽을 기어올라 기어이 산의 정상을 밟고 바람 세찬 꼭대기에 서서

먼저 스쳐 간 마음들이 던진 돌무더기 흔적을 어루만지고

바위에 새겨놓은 삶의 낙서를 보며 가쁜 숨에 움켜잡았던 휘어진 나뭇가지의 푸름을

다시 가슴에 품는 고요한 사색의 시간이다 

그리고 멀리 비어 있는 공간

허허한 수평선의 회색 구름 아래 덧없이 지는 석양빛 보며

'빈손으로 내려가라' 하는 무성음, 그 진리의 속삭임을 듣는 소중한 순간이다

 

그렇게 황혼은

숙성이란 의미를 부여받는 고귀한 의식이 진행 된다

그리하여 어린시절 고향 집 흙 바람벽에 매달려 눈보라 맞던 시래기와 투박한 항아리 속 된장이

함께 어우러져 내던 어미의 손맛 같은 귀한 생의 전리품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뒤란 낮은 장독대 한 삭힌 항아리의 매끈하게 빠진 둥근 허리로 살포시 뜬 초승달

어미 손길 한 번에 반짝 웃고 뚜껑이 열리면

애끓던 간기를 숨기며 익어가던 속살

꾹 눌러 짜던 마른 젖가슴에 토한 젖 찌꺼기가 배어

배고파 움켜쥐면 구수하게 풍기던 어미 가슴의 살가죽 냄새

그 향기가 가득한 잘 익은 된장 

그 진국 덩어리

그것이 바로 황혼의 색이며 향기이다

 

그리고 아무도 바라보지 않던 그을음 묻은 굴뚝 옆 처마 밑에 매달려 마르던 무청

황혼은 그 푸르고 푸르던 청춘이란 이파리가

새끼줄에 꿰어져 풀물이 다 마르기까지 무수한 눈꽃을 피우고 숱한 인연에 엮여

바짝 마른 삭신이 되면 남은 사랑마저 부서질세라

맑은 물에 잠겨 곱게 풀어지는 시래기 같은 부드러움을 베푸는 때이기도 하다

맡아 보라

향긋한 시래기의 머릿내

 

그렇게 황혼은 된장과 시래기처럼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은은한 향과 소박함이 몸과 혼에 밴다

얼마나 멋진 시간인가

우리는 늘 어둠이 오는 탓으로 노을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픈 변론 같지만

황혼은 눈물겨운 세월이 한에 버무려진 독특한 맛이다

 

그러하기에

세상 무엇보다 진정 아름다운 것이다

땀 쏟던 정수리엔 핀

하얀

소금 꽃

그 찬란한 빛처럼....

 


청, 청
고왔던 푸른 풀물이 마르기까지
가시랭이마다 눈꽃 무수히 피고 졌다

더는 마를 수 없는 삭신
엮인 인연마다 간직한 사랑 부서질세라
눈물 적시는 몸
부드러움이 그지없다
어둠 탓인가
아름다운 노을 같은 진한 변론
아 애틋한
어미의 향기

 

손길 따라 퍼지는 정
맛, 맛

 

-'시래기' 전문 -

출처 : 좋은글과 좋은음악이 있는곳
글쓴이 : 炚土 김인선 원글보기
메모 : 나이들어 늦을녁 노을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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