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가 오다
炚土 김인선
아마 생전의 불같은 성질을 참지 못하고 저녁 해가 지기 전에 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아이들 부지런히 오라하고 서둘러 미리 상부터 차려야 할 것이다
북어의 주둥이와 꼬리를 자르자 부스스 하얀 가루가 한 움큼 방바닥에 떨어진다
한겨울 어느 날 아비가 내의 갈아입고 나서 거친 손바닥으로 콩기름 먹인 장판 훑어내자
수북이 모였던 고운 살 비듬 그 가루가 떨어지고 있다
이 못난 자식 정강이도 바짝 말라 벌써 흰 살 꽃 피어 부서져 내리는데
아비의 살가죽은 아직도 마르는가
일 년 만에 반가운 걸음 한 아비 혼이 모처럼 아늑한 방에서 속내의를 갈아입나 보다
돌처럼 단단하던 장딴지를 모진 세월이란 놈이 얼마나 두드렸는지
찬바람에 얼고 녹으며 말라버린 북어처럼 딱딱한 뼈만 남았던 다리가 눈에 선하다
그 다리의 살갗을 깎아 속내의 솔기에 잔뜩 숨겼던 삶의 증표가 지금 내 앞에서 폴폴 날린다
생주이멸(生住異滅)이라 했나
헌 옷 벗고 새 옷 갈아입는 아비의 모습을 보는 듯 내 마음 어느새 이승을 떠나 아비 곁에 있다
말간 밥알 뜬 식혜를 오른쪽에 올리고 푸석하게 마른 북어를 왼쪽에 올린다
뇌리에 주마등처럼 스치는 지난 시절
어릴 적 나는 아비의 고독한 생의 소리를 종종 들었고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귀뚜리 날개가 차가운 달빛을 비벼댈 때 장독대에 구슬프게 내려앉던 창부타령
그것은 허무한 인생을 노랫가락으로 재우는 소리였고
졸음 못 이겨 깜빡거리는 별 보며 새벽밥 먹을 때 깨진 어금니에 부딪히던 놋숟가락
그것은 고단한 인생을 씹어 하루를 깨우던 기막힌 소리였다
창부타령은 아비의 십팔 번이다
황해도 고향에서 어린 시절 창을 배우다만 것이 늘 생각나는지 눈 지그시 감고 부르던 모습
장마통 미루나무에 붙은 참매미가 징검다리 구름 딛고 가는 쪼개진 햇볕을 쬐며
젖었던 날개를 부지런히 비비는 소리였고
제 모르게 찬 서리에 가을이 깊어가면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던 귀뚜라미의 울음이었다
그렇게 길게 뽑아내는 가락 속에는 흙바람 벽 밑을 쉼 없이 들락대는 일개미처럼
고된 삶의 애환이 굽이굽이 배어 있었고
베짱이의 꿈을 바라면서 잔걸음 기어야 했던 아비이기에
어깨를 덩실거릴 흥겨운 가락을 일부러 슬프게 감아올리며 모진 세월처럼 구성지게 편곡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알 수 없는 소리가 있다
그것은 어머니가 '네 아비를 절대 닮지 마라'하고 내게 하던 소리다
왜 어미가 그랬을까
혹 내 아들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까
아내도 아들에게도 그리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홍동백서 좌포 우혜 어동육서 우반 좌갱 다 차리고 향 피우니 말소리가 들린다
'아들아 본 지 오래니 내 무덤에 한번 다녀가거라'
아마 여름내 초록 잔디 끝에 매단 마른 눈으로 자식 생각하며
이따금 지나치는 낯 모를 발걸음조차 반가워 벌떡 일어나 바라보았으리라
내일이면 찬 서리에 눈 끝이 부서져 잔디도 다 죽을 텐데 얼어붙은 흙무더기 속 얼마나 차가우랴
장작더미 불 피우며 한겨울 곁에 있어도 갚지 못할 은혜
늘 소주 한 잔 뿌리고 훌쩍 도망오던 이 못난 놈의 불효를 어찌해야 하나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바람 매워지면 생전의 아버지처럼 하얀 쌀 몇 포대 사 놓고요
손자놈 방한복 사 입히고 어머니 집에 보일러도 손보고 용돈도 드릴게요
산 사람이 먼저라고 늘 그러셨잖아요
그러니 불효한 놈 용서하세요
밖에 나오지 말고 봄까지 참고 누워 계세요
곧 아이들 데리고 갈게요
문득 지난 추석 때 다녀 오는 길에 본 임진강 하구 둘러친 철조망
틈마다 끼워 놓은 돌멩이가 떠오른다
앞에 보이는 고향 땅
가슴 복받치는지 뛰쳐나오려 듯 뾰족이 머리 내밀던 아비 모습 아니었나
음복을 하려고 보니 상에 놓인 음식이 역시나 그대로이다
아비는 할아버지의 성질 닮고
할아버지는 당신 아버지의 성질 닮아 오늘도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저 세상이 어디인지 가보지 않았으니
모처럼 차린 정성
보이는 건지 안 보이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저
보고 싶은 아픔 새기며 불러 볼뿐
아버지
꺼내놓은 새 내복 입으셨죠...
- 2013.11.6 (음 10.4) 새벽에 -
어동육서 우반좌갱
두 번 절
머리 조아리며 반절 한다
그대로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성질 닮고
할아버지는 당신 아버지의 성질 닮아
오늘도
건드리지 않았다
맛없는가
아니 불효한 놈 정성이 부족한 탓일 게다
훌훌
향 연기만 삼색 전 훑고
아, 아버지
오긴 오셨나요
-'아비의 기일'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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