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벨리스크의 구멍
炚土 김인선
할 일이 없는 오후 일찍 들어 온 집안이 오늘 따라 침침하다
창문의 블라인드 올리니 책장에 앉아 있던 먼지가 살아나며
평소 무심히 보던 책꽂이에서 바위에 나무 쐐기가 박혀 벌어진 듯
껄렁한 노트 한 권이 세우다가 만 오벨리스크처럼 비스듬히 꽂혀 시선을 끈다
누런 페이지를 들추니 혼이 발광한 흔적이 황량하게 삭아 내리고 있다
푸른 하늘로 곧추서려던 덜 다듬어진 붉은 화강암이 회색 먼지 속에 묻혀 있다가
유리창을 관통한 햇빛에 꿈틀거리는 것이다
이제 다 잊힌 것이건만 다시 일깨우려 몸부림치는 지난 형상이 애처롭다
그 시간에 젖어들기가 싫어 블라인드 내려 햇빛을 죽이니
서러워진 책상 위에 세찬 모래바람 부는 사막 나타나고 기울어진 돌탑이 나타난다
람세스 2세의 멈춰 버린 영생의 노래가 귀를 파고 들어
뜻 없는 환청에 시달리면서
알지 못할 생의 기호가 새겨진 아름다운 석벽의 의미를 마른 가슴팍에 재현하려고
무디어진 무쇠 끌과 슬픈 나무망치 하나 들고 기어오르던 내가 보인다
무엇을 파내려고 했을까
태생에 대한 축복을 음각하려 했을까
아니면 끊어질 듯 이어온 삶의 징검다리를 건너오며 겪은 눈물겨운 추억을
하나하나 들추어 보려 했을까
꺼내 든 낡은 노트 장의 곳곳에 일부러 낸 볼펜 구멍이 나 있다
아 생각난다
구멍에 대한 분노의 표시
잠시 열 받아 끼적이다가 만 하잘것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어미의 뱃속에서 나오던 날
열 달간을 지낸 안락한 천국에서 백 년간을 지낼 고난의 지옥으로 뚫린
화이트홀을 빠져나올 때 그 때의 기억은 없다
그러나 순수하고 성스러운 생명의 구멍을 나온 후 세상에서의 또 다른 구멍을 보았고
숱하게 존재하는 막아버려야 할 어떤 구멍에 화가 났던 것이다
그렇게 구멍에 대해 거부감을 같게 한 동기가 문득 생각난다
중학생 시절 동인천역 앞 골목이었을 것이다
여관 영업을 하던 친구 집에서 시험공부를 하던 어느 휴일 한낮
예사롭지 않은 사이로 보이는 남녀가 들어간 방을 몰래 훔쳐 보려고 복도를 살살 기어가
침대 위에서 발바닥 네 개가 아래위로 겹쳐 흔들리는 모습을 보았다
불륜이 보이던 열쇠 구멍
그때부터 슬픈 구멍에 대한 관찰이 시작된 것이다
대강 훑어 내리는 낙서장의 페이지마다 휘갈기다 만 그런 구멍이 나열 된다
냄새나는 똥구멍과 한 패거리 같은 거짓 발린
아부의 입 구멍
기득권을 위해 청탁의 비리로 결탁한 백태 낀
흐릿한 눈구멍
뇌물이 드나드는 권력과 재벌 사이의 보이지 않는
당당한 뒷구멍
돈 삼키는 로또 번호가 기어 나오는
개미귀신의 구멍
몇 푼 안 되는 일당에 가스 중독으로 주검이 되는
하수도 구멍
어뢰에 맞아 꽃다운 청춘이 수장된
군함 밑창의 구멍
아아
눈구멍 빠지게 하는 구멍이 이리 많았나
노트를 덮는다
더는 보면 무엇하는가
내가 갈망하던 구멍도 버젓이 그곳에 적혀 있으니
그 구멍을 탓할 수 있겠는가
괜히 답답해지는 공간
블라인드를 다시 올리고 닫힌 창문 열어젖히니
어느새 금싸라기 같던 햇살이 사라지고 저녁노을 엷어지며 바람이 잠잠히 날개 접고 있다
욕망으로 헤진 눈구멍으로 깔려오는 어둠 자락
하늘가에 커다란 구멍 보인다
언젠가는 갈 저승으로 통하는 구멍인가
선뜻 볼 수 없는 무섭고 묘한 기분이 드는 시간 오감을 상실하는 졸림의 순간처럼
갑자기 의식이 암흑으로 빠지며
사라지는
나의 오벨리스크
서서히 다가오는 통로의 끝
서러운 터널 지나온 족흔
더듬어 줄 사랑도 다 사라져 간다
정신착란 속 살아가듯
아침밥에 멍하니 저녁밥마저 넘기며
공허한 의식에 부질없는 세월에 매달고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혼 짓
낙엽 되어 썩든
구름 되어 흘러간들
탓해 무엇하리
아픔마저 흔적 없이 사라질
생의 종결 향해
시시각각 자동으로 눌러지는
백스페이스의 두려움
잊힌다는
이 더러운 확신
- '잊힌다는 두려움으로' 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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